가부장제 시대, 노인의 서러움 1위는?
1982년 대한민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사회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가 충돌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라는 오랜 유산이 여전히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이 시기에 KBS는 60세 이상 노인 238명을 대상으로 노인들의 의식 및 생활 실태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 조사는 당대 노인들이 겪었던 정서적 어려움, 선호하는 생활 양식, 그리고 가족 및 사회와의 관계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한국 노년층의 복합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당시 KBS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82년 노인들의 의식과 생활의 주요 특징들을 알 수 있습니다.
조사 결과 중 노인들이 가장 서운했던 일에 대한 응답은 흥미롭습니다.
노인들이 가장 크게 서운함을 느꼈던 일은 '몸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병원이나 약국에 데려가지 않을 때'였습니다. 무려 21.1%가 이 항목을 꼽았습니다. 이는 노년기의 가장 큰 관심사인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로 자식들로부터 돌봄과 배려를 기대하는 전통적 정서와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자녀들이 노부모의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서운함을 느낀 일은 '장남이 첫딸을 낳았을 때'로 14.3%가 응답했습니다. 이 결과는 1980년대 초반까지도 사회 전반과 가정 내에 얼마나 강력하게 장남 선호와 아들 선호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장남'은 집안의 대를 잇고 부모를 부양하는 핵심적인 존재로 여겨졌고 장남이 첫 아이로 딸을 낳았을 때 대를 잇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나 실망감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외에도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자식이나 며느리가 인사를 하지 않을 때'나, '용돈이 떨어진 줄 알면서도 모른 체 할 때'도 노인들은 매우 섭섭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인사는 기본적인 예의이자 부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여겨졌으며, 용돈 문제는 경제적인 도움의 의미를 더해 부모의 생활에 대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였습니다.
정서적인 서운함과 별개로, 조사 결과는 노인들의 실제 생활 방식과 주요 관심사에 대한 흥미로운 통계도 제공합니다.
노인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44.2%가 '본인과 배우자의 건강'이라고 응답했습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건강 유지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입증하며 위에서 언급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때 서운했다'는 응답과 맥을 같이합니다. 건강은 노후의 안녕과 독립적인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기에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거 형태와 관련하여 76.1%의 노인들이 아파트나 공동주택보다는 단독주택에 살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60.5%는 농촌보다는 도시에 살기를 원했다고 응답했습니다. 당시 노인들이 자녀와 함께 사는 대가족 형태를 선호하면서도 주거 환경 자체는 전통적인 단독주택의 독립성과 편리함을 선호했습니다. 동시에 도시에 살기를 원한 것은 의료 시설, 교통, 문화생활 등 도시가 제공하는 편의성도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노년층의 생활 패턴도 도시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 실태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육류, 과일, 야채, 생선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부양과 관련해서는 58.8%의 노인이 장남의 부양을 받고 있다고 응답해 여전히 장남 중심의 부양 관행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는 노인 복지 정책의 초기 단계였던 당시 사회 복지 시설 이용의 불편함도 드러냅니다.
경로우대증 소지 노인 중 19.9%가 '불친절이 귀찮아 아예 요금을 다 낸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경로우대 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용 과정에서 직원들의 불친절한 태도나 복잡한 절차 등으로 인해 노인들이 오히려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혜택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