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팔아 유학비 마련하던 그때 그 시절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 거주하는 대학생들은 하숙비나 방값, 그리고 각종 생활물가의 압박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현재도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원룸 가격이 매년 치솟아 학생들의 걱정을 더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도 높은 물가 때문에 힘들어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과외 외에 적당한 아르바이트 자리도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1969년, 입시개혁의 여파로 과외 아르바이트가 급감하면서 대학생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직업소개소에는 가정교사 자리를 찾는 학생들이 매일 30명씩 몰려들었지만, 실제로 이를 필요로 하는 학부모는 겨우 3~4명에 불과했습니다.

학기 초에 하루 평균 150여 명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붐비던 신문사 광고부도 이제는 20여 명으로 줄어들어, 구직난이 심각함을 실감케 했습니다.

그 시절, 고려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한 한 학생은 시골집에서 쌀 20가마를 팔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등록금으로는 5만 7,850원이 필요했고, 하숙비는 1만 5,000원, 교재비와 잡비, 교통비로는 1만 9,000원을 지출하면 남는 돈은 겨우 7,000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대학가 주변의 하숙비도 껑충 뛰어올라 서울대학교 근처 명륜동의 경우, 하숙비가 지난 학기보다 1,000원 오른 8,000원이었고, 고려대 주변 제기동 일대는 7,500원, 신촌 일대에서는 독방일 경우 1만 5,000원이었습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하숙비가 4,500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4년 만에 약 3배나 치솟아 대학생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