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子), 숙(淑), 희(姬)의 전성시대!
오늘날 연애 예능 〈나는 SOLO〉를 보다 보면 '영숙, 정숙, 순자, 영자, 옥순, 현숙' 같은 출연자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요즘 2030 세대에게는 옛날 외할머니나 고전 영화에서나 들을 법한 오래된 이름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60여 년 전만 해도 이 이름들은 전국의 학교와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당시의 인기 이름이었습니다.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 이름의 유행과 어감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 시절의 이름들에는 그 시대만의 독특한 사회상과 부모들의 간절한 염원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1960년대 신문 기사와 졸업앨범 속에 남아 있는, 지금 들으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뭉클해지는 그 시절의 흥미진진한 이름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1960년대 교실의 풍경: “A, B, C 나와라!”
1963년 조선일보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 학교 현장에서 벌어진 웃지 못할 동명이인 소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콩나물시루 같던 당시 교실은 한 반에 기본 50~60명, 많게는 70~80명씩 들어차곤 했는데 교실 하나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여학생이 서너 명에서 많게는 너섯 명씩 존재했습니다.
▪ 학적부 위의 알파벳 출석부: 선생님들은 출석을 부르거나 성적표를 처리할 때 엄청난 혼선을 겪었습니다. “김혜경!” 하고 부르면 서너 명이 동시에 “네!” 하고 대답하거나 서로 눈치를 보기 일쑤였죠. 결국 교무실과 출석부, 나아가 졸업앨범에까지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이는 해결책이 도입되었습니다. '김혜경A', '김혜경B', '김혜경C'처럼 마치 공장의 제품 번호처럼 학생을 구별해야 했던 웃지 못할 시절이었습니다.
▪ 신체 특징으로 완성된 정겨운 별명: 정작 학생들끼리는 삭막한 알파벳 대신 훨씬 직관적이고 정겨운 별명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키나 덩치에 따라 '큰 혜경이', '작은 혜경이'로 부르는 것은 양반이었고 얼굴이 하얗다며 '백(白)혜경', 안경을 썼다며 '안경 혜경이', 심지어 집이 있는 동네 이름을 붙여 '신촌 혜경이'라 부르며 서로를 구별했습니다.
'자(子)' 자 들어간 이름이 40%였던 대혼란의 이유
당시 신문이 여학생들의 이름을 분석한 한자 통계는 혀를 내두르게 만듭니다. 여학생 전체의 무려 40%가 이름 끝에 '아들 자(子)' 자를 달고 있었고 '숙할 숙(淑)'이나 '계집 희(姬)'가 들어간 이름도 각각 10~15%를 차지했습니다. 즉, 반 아이들 열 중 여덟 아홉은 몇 가지 특정 음절을 돌려가며 조합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 일제강점기의 잔재인가, 한자 문화권의 유산인가: '자(子)' 자 유행의 기원에는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서 여성 이름 끝에 '子'를 붙여 '코(こ)'라 읽던 명명법(예: 자와코, 유키코)이 전파되어 '순자, 영자, 정자, 숙자, 옥자' 같은 이름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일제 잔재'로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본래 동양 한자문화권에서 '子'는 으뜸, 덕망, 혹은 귀한 자식을 뜻하는 신성한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 해방 후의 몸부림과 끊이지 않은 관습: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신문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일본식 느낌을 주는 '子' 자를 붙이지 말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실제로 해방 이후 출생아부터는 '자' 자가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간 고착화된 부모 세대의 명명 습관과 작명소의 관성 탓에 1960년대 초반 졸업앨범 속에서도 '자' 자 자매들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자'에서 '숙'과 '희'로 그리고 ‘지영’이로 이어진 세대교체
'자' 자의 기세가 꺾이자 그 빈자리를 빛처럼 채운 것은 '숙(淑)'과 '희(姬·熙·喜)'였습니다.
1960~70년대로 넘어가면서 단정하고 숙녀다운 느낌을 주는 영숙, 정숙, 미숙이 교실을 채웠고 이어 여성스럽고 단아한 어감의 영희, 정희, 경희, 옥희가 전국을 지배했습니다.
이어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는 혜경, 지영, 수진, 은정, 혜진처럼 보다 현대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의 이름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 여성의 이름은 어느 한순간에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와 부모 세대의 취향이 반영되면서 조금씩 달라져 왔습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와 겹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음과 느낌은 물론 개성과 이름에 담긴 의미까지 꼼꼼하게 살펴 이름을 짓습니다. 그래서 서윤, 서아, 하윤, 아린처럼 다양한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963년 졸업앨범에 등장하는 '혜경A'와 '혜경B'의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름이 비슷해 구분하기 위해 알파벳까지 붙여야 했던 당시의 모습은 개성과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름의 변화만 살펴봐도 지난 60여 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세대와 시대의 변화가 어떻게 일상에 스며들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