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냐 연수냐…아이 성별이 달라진다? - 1974년
아들이 태어날지 딸이 태어날지는 과연 자연의 우연일까요? 아니면 부모가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을까요?
현재 유전학에서는 아기에게 전달되는 성염색체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합니다.
여성의 난자는 X 염색체를 하나 가지고 있고 남성의 정자는 X 염색체를 가진 정자와 Y 염색체를 가진 정자로 나뉩니다. 이 가운데 어떤 정자가 난자와 만나 수정하느냐에 따라 수정란의 성염색체가 일반적으로 XX(여성) 또는 XY(남)로 결정됩니다.
쉽게 말해 난자에는 X 염색체만 있기 때문에 아기의 성염색체를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어떤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다만 이를 단순히 'X 정자와 Y 정자의 경주에서 누가 이기느냐'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수정에는 여러 생물학적 과정이 관여하며 부모의 음식이나 생활습관 등으로 아들이나 딸의 성별을 확실하게 선택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도 없습니다.
하지만 약 50년 전인 1974년 12월 <경향신문>에는 당시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매우 이색적이고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소개되었습니다.
바로 사람이 마시는 물의 성질(연수와 경수)과 남성이 받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출생 성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이었습니다.
당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두 가지 독특한 가설의 내용입니다.
연수를 마시면 딸, 경수를 마시면 아들?
1974년 통계학자 윌리엄 라이스트(William Lyster) 씨는 지역 수질과 남아·여아 출생 비율 사이에 묘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 브리스베인 홍수의 미스터리: 라이스트 씨는 호주 브리스베인 지역의 출생 기록을 분석하던 중 1966년 대홍수 이후 남아 출생 비율이 현저히 낮아진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홍수로 인해 주민들이 섭취하는 식수 환경이 변화하면서 미네랄 함유량이 적은 연수(軟水)를 주로 마시게 되었고 이것이 여아 출생 비율을 높였다는 해석이었습니다.
▪ 수질과 성별 가설: 그는 물속에 포함된 특정 칼슘·마그네슘 등 미네랄 성분이 남성의 정자나 여성의 수정 과정에 영향을 미쳐 경수(硬水)를 마시는 집단에서는 아들이, 연수를 마시는 집단에서는 딸이 더 많이 태어날 수 있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남성에겐 딸이 많다?
라이스트 씨가 제기한 또 다른 가설은 남성이 받는 생체적·정신적 스트레스와 성비의 관계였습니다.
▪ 위기 상황과 생식 기능: 홍수나 전쟁, 재난처럼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면 남성의 생식 기능 및 정자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는 주장이었습니다.
▪ 전투기 조종사의 사례: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사례로 늘 목숨을 건 고공 비행과 고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전투기 조종사 집단을 들었습니다.
조사 결과 전투기 조종사 자녀 중에는 아들보다 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는데 이를 스트레스가 Y 염색체 정자보다 X 염색체 정자의 생존이나 수전에 유리한 환경을 만든 결과로 설명했습니다.
현대 의학이 바라보는 1970년대의 가설
당시에는 통계적 관찰 결과를 환경적 요인과 연결하려는 신선한 시도로 주목받았으나 현대 의학 및 유전학 관점에서는 아래와 같은 한계가 명확히 지적됩니다.
1.유전학적 사실: 인간의 성별은 수정 시 난자(X)와 결합하는 정자가 X 염색체를 가졌는지(여성, XX), Y 염색체를 가졌는지(남성, XY)에 따라 단순 결정됩니다. 마시는 물의 성질만으로 이를 유의미하게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2.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착시: 홍수 이후 수질 변화와 성비 변화가 동시에 관찰되었다 하더라도 두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3.교란 변수의 존재: 출생 성비에는 수질 외에도 부모의 연령대, 사회경제적 환경 변동, 인구 구조의 변화, 단순 통계적 표본 오차 등 수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1970년대의 이 가설은 비록 현대 과학에서 정설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아들과 딸의 출생 비율을 환경으로 설명해보고자 했던 당시 학계의 호기심과 호주의 흥미로운 통계 기록을 보여주는 유쾌한 과학사 에피소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