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 들고 재떨이 뒤진 주부들 - 1974년

1970년대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한 다방과 사무실에서 '바짝 태우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곤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이유로 금연을 강조하지만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 발전에 힘쓰던 1970년대 한국에서 담배는 단순히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가계 지출을 줄이고 외화를 아껴야 하는 경제적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백해무익한 담배를 끊자는 말 대신 '피우려면 남김없이 아껴 피우자'라는 기발하고도 눈물겨운 '담배 아껴 피우기 운동'이 펼쳐졌던 1974년의 이색적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974년 1월, 서울의 이색 조사

1974년 1월, 한파가 몰아치던 서울 시내 곳곳에 일단의 여성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사단법인 대한주부클럽연합회 회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찾아간 곳은 번화가의 다방, 사람들이 붐비는 회사 사무실, 그리고 회원들의 가정집이었습니다. 주부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뜻밖에도 재떨이와 줄자였습니다.

당시 석유 파동 등으로 물가가 치솟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주부클럽연합회는 일상 속에서 무심코 새어나가는 낭비를 찾아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들이 주목한 겨냥점은 다름 아닌 남성들의 손가락 사이에 쥐어진 담배였습니다.

회원들은 5일 동안 서울 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사람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하나하나 수거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담배꽁초는 총 654개. 주부들은 돋보기와 줄자를 들고 654개의 꽁초 길이를 일일이 밀리미터(mm) 단위로 측정하는 정밀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줄자로 재어본 꽁초

주부들의 정밀 측정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당시 시중에서 판매되던 일반적인 필터 담배 한 개비의 전체 길이는 필터를 포함해 약 8.3cm였습니다. 이 중 뒤쪽의 필터 길이 2.0cm를 제외하면 실제로 불을 붙여 피울 수 있는 담뱃잎 부분은 6.3cm였습니다.

그러나 주부들이 수거한 꽁초 654개의 평균 길이를 내어보니 4.2cm가 나왔습니다. 필터 2.0cm를 빼더라도 여전히 2.2cm의 담뱃잎이 타지도 않은 채 꽁초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 담배 한 개비 총길이: 8.3cm (필터 2.0cm + 실제 흡연 가능 부분 6.3cm)

▪ 버려진 꽁초 평균 길이: 4.2cm (필터 2.0cm + 버려진 담뱃잎 2.2cm)

▪ 실제 피운 길이: 약 4.1cm (전체 흡연 가능 부분의 약 65%)

▪ 버려진 비율: 전체 흡연 가능 부분의 약 35%

당시 흡연자들은 담배를 절반 조금 넘게 피운 뒤 나머지 35%가량은 재떨이나 길거리에 비벼 끄고 버렸던 것입니다.

"하루에 담배 6개비와 연탄 두 장을 길에 버리는 셈"

주부클럽연합회는 이 수치를 당시 정부(전매청)의 공식 통계와 결합해 더욱 충격적인 경제적 손실액을 산출해냈습니다. 당시 한국 흡연자들의 하루 평균 담배 소비량은 18.3개비였습니다.

하루 18.3개비 중 35%를 버린다는 것은 흡연자 한 사람이 하루에 약 5.8개비(사실상 6개비)의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그냥 재떨이에 버린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낭비를 당시 서민들이 가장 많이 피우던 대표적인 담배 브랜드의 가격으로 환산하자 구체적인 돈의 가치가 드러났습니다.

1. 고급 담배 '은하수' 기준 : 하루에 피우지도 않고 버려지는 담배의 가치는 약 43원 50전.

2. 대중 담배 '청자' 기준 : 하루에 버려지는 가치는 약 29원.

당시 43원 50전이라는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추운 겨울철 서민 가정의 가장 중요한 난방 연료였던 연탄 두 장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담배를 몇 모금 피우고 버리는 습관 때문에 흡연자들은 매일 밤 가족을 따뜻하게 해줄 연탄 두 장을 그대로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1974년 1월 22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다

이 조사 결과는 참신하면서도 충격적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조사 사흘 뒤인 1974년 1월 22일자 경향신문에도 관련 내용이 비중 있게 보도됐습니다.

"은하수 44원·청자 27원이 꽁초로 거의 절반 버무려"

기사는 담배꽁초에 버려지는 돈의 가치를 강조하며 일상 속 미세한 습관이 가계 경제와 국가적 자원 낭비로 이어지는 현실을 강하게 꼬집었습니다.

주부클럽연합회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담배 아껴 피우기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담배를 피우려면 필터 바로 앞까지 아껴 피우자”, “무심코 버리는 담배꽁초 하나가 우리 집 연탄값이다”라는 구호는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담배를 끊어 건강을 지키자고 하지만 당시에는 담배를 끝까지 아껴 피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지금 보면 다소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자와 돈이 부족했던 1970년대에는 담배꽁초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줄자로 담배꽁초 길이까지 재며 가계 살림을 아끼려 했던 주부들의 모습에는 당시 서민들의 절약 정신과 팍팍했던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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