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한민국 최고 부자는?
오늘날 한국의 고액 소득자 순위를 떠올리면 삼성, 현대, SK, LG 같은 거대 재벌가의 이름이나 IT·바이오 신흥 부호들이 먼저 머릿속을 스칩니다. 하지만 시간을 반세기 전인 1971년~1972년으로 되돌려보면 지금으로서는 생소한 뜻밖의 인물들이 대한민국 소득 랭킹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대한민국 소득 1위 자리를 철옹성처럼 지켜오던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왕좌를 끌어내린 것은 다름 아닌 '가발을 팔아 돈을 번 무역상'이었습니다. 당시 가발은 오늘날의 반도체나 배터리에 맞먹는 대한민국의 최고 효자 수출 품목이었습니다.
가발과 건설, 그리고 무역으로 단숨에 거부가 된 신흥 재벌들의 등장은 단순한 개인 자산가들의 순위 변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가난을 벗어나 노동집약적 수출과 국토 개발을 발판 삼아 눈부시게 성장하던 산업화 대반전의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철옹성 같던 '한진 조중훈'을 제친 가발 신화의 주인공, 최준규
1972년 국세청이 발표한 '종합소득세 자납 랭킹'(1971년 귀속 소득 기준)은 재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수송 보국(輸送報國)을 앞세워 독보적인 소득 1위를 고수하던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이 3위로 떨어지고 서울통상그룹의 최준규 사장이 소득세 자진 납부액 약 2억 7,200만 원을 기록하며 대한민국 종합소득세 납부 1위에 당당히 올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초반 서울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수백만 원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세금으로만 수십 배에 달하는 거액을 낸 셈입니다.
최준규 사장의 상봉(飛上)은 그야말로 시네마틱했습니다. 불과 2년 전인 1970년만 해도 그는 소득 순위 22위에 머물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특유의 저렴하고 꼼꼼한 숙련 노동력을 바탕으로 제작된 가발이 미주 지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서울통상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최 사장은 가발 수출과 소규모 무역으로 번 막대한 외화를 바탕으로 거침없는 사업 확장에 나섰습니다. 미국 유니언쉐론을 인수하는가 하면 1955년 국내 최초의 해상보험 전업회사로 설립되었던 동방해상보험(현 현대해상의 전신) 등 금융·보험업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단순한 무역상을 넘어 금융을 아우르는 종합기업집단으로 변모하려는 대담한 야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베일 속의 2위, 그리고 가발과 건설이 만든 신흥 부호들
1972년 발표된 순위에는 최준규 사장 외에도 재계를 놀라게 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 베일에 싸인 2위, 조성근 씨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던 조성근 씨는 전년도 20위권 내에도 이름이 없던 인물이었으나 무려 약 1억 3,600만 원의 종합소득세를 자납하며 단숨에 2위에 등극했습니다. 재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당시 부동산 및 신흥 사업을 통한 막대한 부의 이동을 보여주는 단면이었습니다.
▪ 수송 왕국의 거목, 3위 조중훈 회장
수년 동안 소득 1위를 지켜왔던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은 약 1억 3,200만 원을 납부하며 3위로 물러섰습니다. 비록 순위는 내렸지만 월남 특수와 운송업을 기반으로 한 대기업 창업자로서의 저력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 건설 신화의 선봉, 4위 경남기업 정원상 사장
4위는 1억 1,200만 원을 낸 경남기업의 정원상 사장이 차지했습니다. 당시는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고속도로, 항만, 주택 등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습니다. 정 사장의 상위권 진입은 대한민국 건설업이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 또 한 명의 가발 거상, 5위 다나무역 안인호 사장
5위는 1억 1,100만 원을 납부한 다나무역의 안인호 사장이었습니다. 다나무역 역시 가발 수출 호황을 타고 단기간에 급성장한 기업이었습니다. 1위 최준규 사장과 5위 안인호 사장이 동시 탑 5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 경제에서 가발 산업이 얼마나 큰 돈을 벌어들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진 납부' 순위가 보여주는 산업화 시대의 명과 암
다만, 당시 발표된 '종합소득세 자납 랭킹'을 볼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순위는 최종 확정된 소득이나 개인의 총순자산을 기준으로 한 진짜 부자 순위라기보다는 납세자가 우선 스스로 신고하고 납부한 세액을 비교한 수치였습니다. 추후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최종 결정세액에 따라 순위가 변동될 수 있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위가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이유는 대한민국 산업 구조의 가파른 지각변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가발, 섬유, 봉제 등 노동집약적 제품을 해외에 팔아 외화를 벌어들인 신흥 사업가들은 거머쥔 자본을 바탕으로 건설, 금융, 제조업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습니다. 전통적인 재벌이나 대형 운송 기업에 집중되어 있던 부의 축이 무역과 건설이라는 새로운 성장 엔진으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깊으면 그림자도 깊은 법이었습니다. 당시 급성장한 신흥 기업들 중 상당수는 탄탄한 내실보다는 과도한 은행 차입과 사채(私債)에 의존해 겉모습만 키우는 이른바 '천민 자본주의적 부실 경영'의 허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취약한 재무구조는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결국 기업들의 사채 부담이 한계에 다다르고 금융 불안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1972년 8월 3일,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고 장기 분할상환으로 전환해 주는 유례없는 강수, '8·3 긴급경제조치 '를 단행하기에 이릅니다.
시대를 비추는 거울, 1971년 부자들의 유산
1971년도 소득을 바탕으로 한 1972년의 고액 소득자 순위는 단순한 '돈 자랑'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발을 만들어 팔던 이름 없는 무역상들이 세계 시장을 누비며 부를 일궈낸 성공의 기록인 동시에 차입 경영과 무리한 사업 다각화가 불러온 기업 부실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생생한 명암(明暗)이었습니다.
한진 조중훈 회장으로 대표되는 전통 대기업의 단단한 기반 위에 가발과 건설로 무장한 신흥 기업가들이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등장했던 1971년, 그 시절의 부자 이야기는 오늘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가장 뜨겁고 역동적인 한 장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