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20만 시대를 마주했던 1964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소를 팔아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학은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렸습니다.
오늘날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쉽지 않고 청년들이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현대 사회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60여 년 전인 1960년대 중반으로 돌려보면 당시 청년들도 지금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인 1964년, 이미 언론에는 학사 과잉’과 고급 백수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치열한 입시 경쟁은 물론이고 전공에 대한 고민, 큰 교육비 부담, 졸업 후 취업 문제와 청년들의 정신적 고통까지 이어졌습니다.
60여 년 전 청년들은 어떤 고민을 안고 대학에 다녔을까요?
당시 신문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우골탑'으로 불렸던 대학과 그 시절 청년들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폭발하는 교육열과 '천당 가기보다 어려운' 입시 경쟁
1950년대 중반, 6·25전쟁 직후 전후 복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에 대한 열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당시 국가 전체의 대학 진학률은 매우 낮았으나 사회적 신분 상승의 욕구와 교육을 통한 성공 기대가 결합하면서 특정 지역과 명문고를 중심으로 극심한 입시 과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 상위권 고교의 진학 열풍: 서울의 일부 명문 남자고등학교에서는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할 정도로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었습니다.
◎ 서울대학교 지원 경쟁률:
▪ 1955학년도: 2,720명 모집에 14,616명이 지원해 5.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대학신문 등 언론에서는 이를두고 '천당 가기보다 좁은 문'이라 묘사했습니다.
▪ 1960학년도: 2,930명 모집에 14,159명이 지원하며 고경쟁 구도가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전국 대학 평균 경쟁률이 약 3대 1 수준이었던 것에 비하면 서울대의 입시 문턱은 매우 높았습니다.
◎ 당시의 인기 학과와 전공 선호도
1960년대 초·중반에도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을 좌우한 핵심 기준은 졸업 후 취업 가능성과 사회적 출세였습니다.
▪ 1964학년도 서울대 자연계열: 약학과의 합격 점수가 가장 높았으며 그 뒤를 이어 전자·전기공학, 화학공학, 기계공학 등 공학계열 학과들이 최상위권을 형성했습니다. 이는 산업화 초입 단계에서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 기대를 반영한 결과였습니다.
▪ 인문·사회계열: 경제학과, 경영학과(당시 상학과 등)가 꾸준한 인기를 끌었으며 법학과는 사회적 권력과 신분 상승의 최고 통로로 평가받았습니다.
고급 실업자의 등장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 사회는 준비되지 않은 고학력화의 부작용에 직면하게 됩니다. 고등교육 기관은 빠르게 늘어났지만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산업 구조와 기업 일자리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학사 인구의 누적: 1960년대 중반 당시 누적 학사 학위 취득자는 약 20만 명에 달했으며 1965년 한 해에만 약 3만 8,000명의 신규 대졸자가 사회로 배출될 예정이었습니다.
▪ 44%의 취업률: 1964년 집계된 대졸자 공식 취업률은 약 44% 수준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절반 이상(56%)이 정규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 '고급 백수'라는 신조어: 언론과 사회에서는 대학 졸업장을 쥐고도 갈 곳이 없어 다방을 전전하거나 놀고 있는 청년들을 '고급 실업자' 또는 '고급 백수'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상아탑 내부의 그늘
어렵게 입시를 뚫고 상아탑에 들어간 학생들의 대학 생활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입시만을 목표로 달려온 결과, 대학 진학 후 적성과 미래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 전공에 대한 불만과 회의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는 이러한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 조사 응답 학생의 53%가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 38%의 학생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공을 바꾸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 부족과 교육 환경 비판
당시 조사 자료에 따르면 대졸자들이 대학 4년 동안 읽은 책이 평균 10여 권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학생 개인의 태도 문제라기보다는 입시를 마친 후에도 학점과 시험, 단순 암기 위주의 수업에 매달려야 했던 당시 고등교육의 질적 한계와 비효율적인 교육 환경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이어졌습니다.
◎ 청년층 정신건강 문제의 표출
학업 부담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대학생들의 정신건강마저 위협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약 33%가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신경증(노이로제) 증상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의 청년 정신건강 이슈가 60년 전에도 똑같이 심각한 사회적 관찰 대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지방 유학생의 경제적 부담과 법대 집중 현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유학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대학 교육은 집안의 기둥을 뿌리째 흔드는 경제적 모험이었습니다.
◎ 1960년대 중반 유학 비용의 실제
서울 유학에 필요한 월비용 및 학비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농촌 가계에 가해진 타격
당시 화폐가치를 농촌 경제 수준에 대입해 보면 그 중압감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 쌀과 생활비: 서울에서 자녀 한 명의 한 달 생활비(5,000원)를 대기 위해서는 농가에서 쌀 한 섬을 팔아야 했습니다.
▪ 논과 등록금: 자녀 한 명을 1년 동안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논 한 마지기에서 나오는 연간 소득 전체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 지방 출신 학생 비율과 '법대' 선호 현상
▪ 지방 학생 비율: 서울대학교 재학생의 약 26%, 이화여자대학교 재학생의 약 33%가 지방에서 상경한 유학생이었습니다.
▪ 법과대학의 지방 출신 비중: 특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생의 약 70%가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논밭과 소를 팔아 마련한 자금으로 유학을 보냈기에 지방 출신 학생들은 가장 확실하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판·검사, 고위 공무원 진출 경로(사법고시·행정고시)인 법학 전공으로 대거 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4년의 한국 사회는 산업화의 발동을 걸던 시기였습니다. 이후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기업과 전문직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한동안 대졸자 취업난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다시 1964년과 비슷한 문제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60여 년 전의 학사 과잉론과 오늘날 청년들의 취업난은 시대적 배경과 구체적인 원인은 다르지만 대학 졸업자의 증가 속도와 사회가 만들어내는 일자리의 증가 속도가 맞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1964년의 기록은 대학이란 단순히 졸업장을 따는 곳이 아니라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 그리고 그 교육을 사회적 가치 및 일자리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