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당시 서울 시민의 80%는 무직자
6.25 전쟁이 종전된 이후 당시 우리나라는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에는 무직자가 넘쳐났었다고 합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시가 1957년에 조사한 간이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당시 서울시에 거주하는 총 인구는 157만여 명이었고, 이중 남자가 79만 명, 여자가 78만 명이었습니다.
전체 인구 157만 명 중 13세 이하 55만 명을 제외하고 14세부터 75세까지 직업을 조사했더니 일정한 직업이 있는 사람은 32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비율로 보면 20%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6·25전쟁을 치렀고 1950년대에는 미국 원조(주로 미국 국제협조처 ICA )에 크게 의존하던 시기였습니다.
전쟁 피해로 산업 기반이 거의 파괴된 상황에서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이 원조 물자로 충당되었습니다. 미국의 원조물자인 원면 · 원당 · 소맥 등의 원료를 바탕으로 하여 섬유·제당·제분 등의 경공업이 일어났으나 과잉노동력을 흡수할 만한 경제규모를 형성하지는 못했던 시절입니다.
서울 시민의 평균 생활 수준은 낮았고, 전쟁 고아, 피난민, 실업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월급은 매우 낮았는데 1957년 당시 서울의 평균 공무원 월급은 불과 수천 환(원화 이전 단위) 수준으로, 생계 유지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한국 전체 GNP(국민총생산)는 약 19억 달러 수준으로, 1인당 소득은 '약 70~80달러(연간)'에 불과했습니다. (세계 최빈국 수준)
서울은 한국 인구의 약 10%가 모여 있던 도시였지만 빈민촌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피해 복구와 더불어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서울에는 판자촌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미국 원조를 분배하는 과정에서도 부정과 비리가 비일비재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고용의 증대로 이어져 실업률은 감소했으나 1970년대에는 노동시장의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